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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의 정치학

sook'c 2012. 2. 7. 14:37


 
 
라 투르
<사기꾼>
 
노마디즘 542~543쪽
 
도박꾼에게 얼굴은 머리 이상으로 중요한 무기다.
좋은 카드를 쥐었을 때나 나쁜 카드를 쥐었을 때나 그것을 드러내선 안 되기 때문이다.
 
때론 반대 의미의 얼굴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잘못 썼다간 간파당하기 십상이다.
 
포커-페이스라는 얼굴 관련 개념이 도박판 밖에서까지
환유적 일반성을 획득하는 것도 충분히 이유가 있다.
 
하지만 라 투르의 이 그림은 도박과 얼굴의 상관성을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아주 잘 보여준다.
 
사기꾼인 남자는 옆으로 돌린 얼굴을 하고 있고,
그의 오른족의 순진한 여자는 그를 마주보는 옆얼굴로 게임에 몰두해 있다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남자>는 둘이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 있다.)
 
그러나 남자는 옆으로 돌린 얼굴에서
시선을 슬쩍 비낌으로써 그 순진한 얼굴과 공명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가운데 있는 두 여자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하고 있다.
 
정면의 여자는 앞얼굴고 앉아 있지만, 시선을 완전히 삐닥하게 돌림으로써
어떤 심각한 의심을 하고 있음을 '의미화' 한다.
 
그리고 그 시선과 짝하여 하나인 듯한 여자가 옆얼굴고 마주고보 있다.
정면에서 벗어난 시선과 마주보는 얼굴은 주체화의 공명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하나의 시선 역시 옆으로 돌린 얼굴에서 재차 벗어남으로써
'시선과 옆얼굴의 공명'을 야기하고 있는 곳을 본다.
그렇게 그것은 주인의 시선을 받아 사기꾼에게 넘기는 시선이 된다.
그러나 남자는 그 시선과 마주하길 피함으로써 거듭되는 주체화의 공명을 피한다.
그것은 의혹을 모른 체함으로써 모면하려는 사기꾼의 얼굴이 된다.
 
뒤로 감춘 손이 없이 이 시선만으로도
그가 정직하게 게임에 몰두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라 투르는 시선이 눈동자를 표시하는
검은 구멍의 작용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절묘한 상황을 통해서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http://www.oberlin.edu/allenart/artpix2/kokoschka_oskar_fi.jpg

 

 


http://www.buceriuskunstforum.de/img/11/archivbild.jpg

 

 

 

 

http://www.leninimports.com/oskar_kokoschka_gallery_31.jpg

 

코코슈카

노는 아이들

 

554쪽

이번에는 다행히 누드가 아니다.

감히 아이들의 누드를 그릴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렇지만 사내고 여자애고 아이들의 얼굴은 정말 어이가 없다.

저게 어디 아이들의 얼굴이야?

술주정뱅이나 마약쟁이의 얼굴이지!

청순함과 순결함 대신

삶에 지치고 술에 찌든 것 같은 이 얼굴 또한

아이들의 '원소적 얼굴'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었고,

그래서 이번에는 옷을 입은 아이들의 얼굴에 사람들은 분노를 표시했다.

 

코코슈카를 포함해 표현주의자들은

이제 사람들의 얼굴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을 새기기 시작한다.

사체에게서나 볼 줄 알았던 시퍼런 색깔을 얼굴이나 신체에 칠하고,

거친 질감의 터치를 이용함으로써 그들은 예상하지 못한 얼굴들을 발명한다.

성스런 얼굴, 이상화되고 신화화된 얼굴을 전복하고 싶었던 것일까?

전쟁으로 쏠려가는 끔찍한 세상.

그런 세상에서 그들이 느꼈던 것에 이런 식의 표정을 부여하여 얼굴로 풍경화하고 싶었던 것일까?

 

 


http://justinsomnia.org/archive/freshman/Art_Manet_Olympia.jpg
 
마네
올링피아
 
 
552쪽
아니, 이 여자의 표정은 대체 무엇인가?
몸은 티치아노의 비너스를 본떠서 누웠건만,
거기 있던 격조 있는 아름다운 얼굴 대신,
뻔뻔스런 느낌마저 주는 이상한 표정을 하고서 어쩌자는 것인가?
유혹의 인력(引力)마저 느껴지지 않는,
닳고닳은 창녀 같은 저 눈매와 입,
벗은 몸에서 어떤 부끄러움이나 수줍음도 느끼지 않는 채 정면을 곧바로 쳐다보는 얼굴.
그래서인지 어떤 격조나 품격도 없는 그저 벗은 몸일 뿐인 육체이다.
슬쩍 슬리퍼까지 걸쳤다.
 
혹시 그림을 보는 우리마저 닳고닳은 고객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분명히 안면화되긴 했지만,
그림에서 기대되는 누드의 원소적 얼굴과는 거리가 먼 이런 종류의 누드는
많은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고,
덕분에 마네는 같은 시기에 누드를 그린 수많은 다른 화가가 있었건만,
사회적인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었다.
 
 
 
 

 

 

http://www.theartgallery.com.au/ArtEducation/greatartists/Bondone/lwf5.jpg

559~559쪽

 

지오토

성흔을 입은 성 프란체스코

 

서기1년, 거대가 아무런 조각상이나 초상도 남아 있지 않았는데,

서양사람들은 대체 예수의 얼굴을 어떻게 알고 그렸을까?

더구나 근대의 화가들은 정호가한 재현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들은 더 오래 전에 살았던 아담과 이브도 그랬고, 모세도 그렸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제우스와 헤라클레스, 박카스와 큐피드도 정말 '리얼하게' 그리지 않았던가?

그것은 언제나 상상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정확한' 상상을 위해서 그들은 얼굴에 대한 자신들의 통념에 따랐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좋은' 얼굴, 아름다운 얼굴로 그들의 모습을 '이상화' 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그리스도로 만들었고,

그런 그리스도의 얼굴에 따라 모든 얼굴을 만들었다.

 이건 상상하며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그리스도를 이용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리스도가 자신의 뜻을 펴기 위해 화가들을 이용하는 것일까?

 

지오토의 그림에서 프란체스코는 예수의 성흔을 받는다.

그런 식으로 예수의 형상. 예수의 얼굴은 프란체스코의 신체에 새겨진다.

기적! 그리고 바로 그 기적같은 흔적이 프란체스코가 성인임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증거가 되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하다.

성흔을 받는 자는 누구나 기적을 본 것이고, 성령을 '입은' 것이다.

따라서 신의 가호를 바라는 자,

성령을 '입으려는' 자는 누구나 그리스도화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유럽인들은 자신의 신체에 닿은,

저 보이지 않는 실을 움직여 자신이 손에 넣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이용했다.

 

 

 


Quentin Massys. Old Woman. (The Queen of Tunis). c. 1513. Oil on panel. National Gallery, London, UK.
 
565쪽
 
마사이스
튀니지 왕녀
 
변방의 얼굴이 모두 끔찍한 것은 아니다.
마사이스의 이 그림은 왕녀를 그린 것이다.
그러나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 같은 멀쩡한 백인들의 나라에
어떻게 이런 기이하고 추한 모습의 왕녀가 있을 수 있으랴!
그건 광인이라도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반면 변방에 있는 나라,
그래서 인간인지 아닌지 의심을 받기도 했고,
때론 인간이 아님에 의문조차 갖지 않기도 했던 그런 나라에서는
왕녀조차 이러하리라고 생각하는 건 그들로선 아주 쉬운 일이다.
그런 나라에서는 다행히 얼굴이 희다면 틀림없이 눈이나 입이,
혹은 다른 선들이 기이하게 삐뚤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피부의 어둠만큼이나 행동도 야만적이리라는 생각과 공모하여
이처럼 다소 다른 방식의 '원소적 얼굴'을 만든다.
11번째 선택일까, 9번째 선택일까? 아니며 그 이상?
안면성의 추상기계의 경계가 배가되는 만큼 이 왕녀의 주름도 늘어나고 그 추함도 늘어난다.
유럽인 아닌 다른 어느 족속도 이런 식의 상상력을 발휘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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